30대가 넘으면서 패기 따위는 수증기처럼 증발한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아직은...>이었나보다.


이 여행은 프라하에 가보는 게 평생 소원이라던 회사 과장님의 한 마디가 발단이 되었다.

이후의 전개는 설 연휴를 불과 일주일 앞두고 "과장님, 가요!" 하던 나의 충동질이 가능하게 했다.

유례 없던 설 황금연휴 그리고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던 평일 이틀 모두 연차 사용 가능하다는 대표의 선언은 긍정적인 촉매제.


어렵사리 구한 항공권 200만원짜리를 통해 생애 첫 할부를 경험했고

여행은 카드빚으로 가는 것이란 말이 왜 여행의 진리가 되었는지 깨닫게 됐다.

(빚은 갚으면 되니까. 그 돈 안 쓴다고 모으는 것도 아니다. 겁나 합리적...)


그 시절이 직장인으로서의 인생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는 것은

여행을 가장 여행답게 만들어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회사 이사님의 추천으로 가게됐다.

계획된 일정이라고는 체코에 도착한 다음날에 이곳을 간다는 것뿐이었다.

<Student Agency>라는 버스 회사에 사전에 예약을 한 후, 티켓을 출력해갔다.


노파심에 적어보는데 사실 난 이때 일상일대의 실수를 했다.

유럽에서는 날짜를 표기할 때 일/월/연도 순으로 한다.

그 점을 생각하지 않고 난 티켓에 적힌 날짜를 우리나라식으로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예약 날짜가 16.02.15

숫자 16은 아예 건너뛰고 15만 보고, 15일에 가는 걸로 알았던 것.

버스에 탈 때 승무원이 티켓을 보고도 그냥 태워줘서 몰랐던 것....


아무것도 모르고 탄 Student Agency 버스는 그렇게 체스키로 향했다.

모닝커피도 서비스로 주고 와이파이도 됐던 좋은 버스.





시외버스들이 정차하는 시골의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 내린 후

뭔가 부내나는 주택가를 거쳐 내려가 길을 건너면 드디어 목적지가 나타난다.

입구에는 펜션 건물이 줄지어 있다.

유럽에서도 펜션이란 단어를 쓰는구나 새삼스럽고...





구름이 잔뜩 끼어 여행하기에 좋은 날은 아니었다. 2월의 동유럽은 스산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렇지만 체스키 크룸로프의 풍경은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커다란 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다.

흔히 동화 같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진부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알맞은 표현은 없는 것 같다.





그 흔한 현대식 건물 하나 없다.

파리로 여행을 갔을 때 지내게 됐던 B&B 숙소의 사장님이나,

영국에 갔을 때 가이드님, 프라하 팁투어 가이드님이 해주신 말씀 중 공통된 부분이,

그 나라의 건축법이 매우 엄격해서 창틀이나 지붕 하나도 스타일이 지정되어 있고

보수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현대를 사는 시민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책이겠지만

도시를 이루고 있는 건물 하나 하나에 가치를 부여하고 존중한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영원히 내 것일 것 같지만

나는 없어져도 그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을테니 당장의 욕심을 내는 일이 우스운 것 같기도 하고.





스보르노스티 광장

사진의 오른편에 인포메이션센터가 있다.

여기서 돌아가는 버스를 예약할 수도 있고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길이 나있다.

지도따위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1분 1초가 아까워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2년이나 지나 저화질의 사진만 봐도 감탄이 나오는데 그때는 오죽했으랴.






사방팔방 나있는 길은 어느새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걷다보니 체스키 크룸로프성이 나온다.






성에 올라가 마을 전경을 둘러봤다.

채 녹지 않은 눈이 나름의 운치를 만들어준다.

봄이 되어 파릇파릇할 마을 풍경도 보고싶어지는 순간이다.


마을을 휘감아도는 강은 블타바강이다.

강이나 호수 등 물줄기는 지역의 분위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날이 더워지면 이곳에서 발을 담구고 더위를 식히는 모습도 떠오른다.
















마을 곳곳을 걷다보면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다.

목각인형 같은 것을 파는 곳도 있고 기념품을 파는 곳도 있고...

그저 가게일뿐인데 아기자기하고 동화적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점심식사는 체스키 크롬로프의 <파파스리빙>이란 곳에서 했다.

살짝 어두운 실내는 아늑한 분위기가 있었다.

체코에서 가본 레스토랑들 중 이곳이 제일 맛있었다.

특히 피자의 치즈가 예술!


잘 구경하고, 잘 먹고 다시 프라하로 떠나려는데

버스 승무원이 이날 티켓이 아니라며 탑승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아차린 것.

기왕지사 아예 체스키 크롬로프에서 1박을 할까, 아예 할슈타트까지 가버릴까 과감한 결심까지 갔지만

다행히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는 티켓을 예매해주었다.

사실 그것도 당황스러운데, 고단한 심신으로 도착한 고속버스 터미널은 프라하 외곽에 있어서 더 당황했다.

여기가 어딘가 우왕좌왕하다 GPS를 켜보니 프라하 지도의 맨 아랫쪽이 찍힌다.

프라하에 지하철이 있어 다행이었다.







여러가지 해프닝으로 인해 이날 정말 피곤했다.

아시안 음식들을 파는 곳이 있어 정겨운 마음으로 들어가 쌀국수를 시켰더니, 고수가 잔뜩이다.

슬라이스되어 꺼내지도 못하고...

지금이야 고수를 아주 잘먹지만 그날은 그냥 다 남기고 왔더니 직원이 왜 그냥 가냐 묻는다. 죄송...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데 숙소 옆에 레스토랑이 있어 일단 들어갔다.

체코 음식인 꼴레뇨도 있고 슈니첼도 있다는 사실에 피곤이 다 풀린다.

조금 짜긴 했지만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같이 간 언니가 등지고 있던 창문 밖에서 체코남자들 한무리가 우리를 보고 난리가 났다.

첫날에도 길 가던 남자놈들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난리라 기분이 나빴는데. 동양 여자들이 만만한 거겠지.

곁눈질로 다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 대화만 계속 했는데, 그 난리를 장장 10분을 피우고 가더라.

평탄하지 못한 하루였지만 그 어떤 여행보다 기억에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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